아래 글은 19년도에 쓴 글인데, 다양한 예시는 들었지만 결국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어떻게 옳지 않다는 주장은 빈약하게 쓴 것에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관련해서는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주의 신념이 강하게 묻어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공정하다는 착각>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신문스터디 주제 :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정당한가.
결론 :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사회문제에 있어 불가피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논리는 깨져야한다.
이는 이기주의에서 비롯되었기에 논리라하기도 부끄럽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소수의 희생'을 '의견조정의 아름다운 결과'로 착각한다. 불가피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갖기 보다는 뻔뻔함을 내세운다. 이에 관한 내 의견을 아래를 적어본다.
사람이 적은 집단(예를 들어 자치국가)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토론을 하여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12인의 노한 사람들>이란 영화는 만장일치의 좋은 예다. 한 소년의 살인죄를 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이 최종결정을 위해 회의에 소집된다. 이때 회의는 무조건 만장일치여야지 끝난다. 한 명이라도 무죄라 생각하면 토론을 통해 유죄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설득시킨다. 유죄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죄라 주장하는 사람을 설득시킨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을 내릴 때까지 토론을 하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땅덩어리는 크고, 사람은 많고, 해결해야될 사안은 한가득이다. 한 사안에 대해 만장일치가 나올 때까지 여러 집단이 토론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비효율적이다. 그렇기에 다수결의 원리,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필연적 선택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에 따른 반박은 다음과 같다.
1) 다수(숫자가 많아지면서 그 의견에 힘이 실린)의 선택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만한 근거가 되는가?
- 1884년, 바다에서 선원 4명이 남대성양을 24일간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당시 구조되었던 인물은 선장, 항해사, 일반 선원이었고, 승무원이었던 소년은 셋에게 잡아먹힌 뒤였다. 당시 17살 남자아이는 바닷말을 마시다 병이나 있었고, 고아였다. 셋에게는 부양가족이 있고, 한 사람을 죽여서 먹지 않으면 모두 죽을 판이었다.
만약 한 사람을 먹음으로써 얻는 다수의 행복과 이익, 비용 모든 것을 감안한다면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살인라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다수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한 개인의 존엄과 삶과 권리는 무시 되어도 되는가? 이는 살인을 정당화시켜 사회에 혼란을 줄 뿐이다. 다수의 최대 이익을 위해 소수를 희생, 극단적으로는 살인까지 해도 된다는 사회라니, 끔찍하다.
2. 다수의 선택은 ‘차별’이라는 개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 불과하다.
- 위의 의견과 비슷하다. 다수의 선택, 그 집단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만 힘이 실릴 경우, 자연스레 '차별'이 생기며, 그 차별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거잖아?"라는 말로 묵살된다.
- 과거 대추리 마을에서의 미군기지 설립이 그러했다. '돈 필요없다. 그저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마을 사람들의 저항은 다수의 의결로 묵살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다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국가 전체의 의견을 따지다보니, 마을이 자연스레 소수의견이 된 것이다.
- 다른 예로는 송전탑, 핵발전소, 군부대 시설, 저수지 등이 있다. 재밌는 것이, 이러한 것들은 도시 한복판에 들어서지 않는다. 모두 도시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이나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작은 구역에 들어선다. 이른바 ‘다수(도시)’를 헤아려서 ‘소수(시골)’가 희생해야 한다는 경제논리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 논리에는 사람이 없다. 희생된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살림을 꾸려야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가성비만이 정책을 움직인다. 소수의 의견?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다수의 의견을 집행하는 것에 대한 댓가 그만한 돈을 주면 되지 않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시장논리로 그 가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 돈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기에 소수자들은 저항하는 것이다.
3. 소수의 저항을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다수결의 논리.
- 다수결의 논리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수의 저항을 이기주의로 매도한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에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본인들만 생각하고 욕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공정한 절차를 거쳐 선정했다는 논리로 정당화한다.
- 과연 ‘공정’한 절차를 따랐을까? 다수의 의견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큰 그림으로 보여진다. 소수의견은 별종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모두가 YES라 생각하는데, 그 안에서 NO라고 외치는 사람은 눈에 띄고 압박받을 수 밖에 없다. 그 안에서 어떤 의견이든지 충분히 조작 가능하다. 예를들어 공사 중인 미국기지 앞에서 시위하는 대추리마을 주민들. 언론에서 거액의 돈을 받았다 전하고 그들의 얼굴을 찍는다. 배가 불렀지. 그만한 돈을 준다면 만족해야지, 왜 저럴까. 돈 더 달라고 그러는거 아냐? 자기들이 조금만 참으면 우리나라 국력이 올라가는데, 나라를 위해 그 정도 희생도 못하나?-라는 여론이 모여졌다고 가정하다. 이때 과연 공정한 절차가 진행됐을까?(대추리마을을 위한 여론이 모여졌다면, 지금 그 마을에 미군기지는 설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뭐, 공정하다 치자. 그럼 공정하다고 해서 다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옳은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현대 사회에서는 불가피하다.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수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 다수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소수의견을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으며,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정당방위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