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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조각

내 스타일

by ●◇●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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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안에는 6mm로 밀어주세요. 앞머리는 눈썹안보일 정도의 길이가 좋구요. 옆머리도 투블럭인거 잘 티 안나게 귀에 닿을듯 정도로 잘라주세요. 아, 숱도 쳐주시는데 앞머리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좋아요."

미용실 의자에 앉아 안경을 벗기 전에 앞 옆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을 한다. 8년 동안 이런 저런 헤어 수모를 겪으면서 나만의 스타일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투블럭이어도 미용사님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고, 같은 미용사님이어도 날에 따라 머리 모양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옆머리가 싹뚝 잘려 속살이 다 보인다거나, 뒷머리가 상고로 변해서 속살이 다 보인다거나 나를 부끄럽게하는 순간들 말이다.

옆에 속살이 보이는게 부끄럽다면서 투블럭을 고집하는건 단순히 머리숱이 많기 때문이다. 숱이 많은데 굵은 컬의 곱슬이다. 드라이기로 말리는 순간 머리는 오븐 속 식빵처럼 곰실곰실 부풀어오르고 자기 멋대로 뻣어간다. 앞머리는 고데기로 살살 달래가며 죽여보지만, 옆머리는 땀을 조금만 흘려도 하이바처럼 부풀어오른다. 다운펌으로 옆을 죽여보라는 제안을 몇 번 들었지만, 3주에 1번씩 미용실을 가는데, 비싼 돈들여(대학생 기준으로, 지금 소비관념에서도 나에게 펌/매직 시술은 비싼 편에 속한다) 죽인 머리를 가위로 싹뚝자르는게 아까웠다. 그래서 과감히 옆머리를 밀어버리기로 했다. 속살이 비치는건 부끄렆지만, 옆머리로 덮어버리고, 시원한 감각과 반쯤 엎드린 내 옆머리를 보며 매우 만족하고 있다.

앞머리는 무조건 눈썹을 덮어야 한다. 눈썹이 진한 편인데 이 눈썹이 들어날 정도로 올라가면 동그란 얼굴의 호섭이가 보인다. 이쁘게 올라가면 앞머리를 가르거나 올려서 드러낼텐데, 자기주장이 강한 곱슬머리는 그게 맘대로 안된다. 그래서 꼭 눈썹을 덮을 정도의 길이를 강조하고, 3주 정도 지나면 갑갑한 앞머리에 머리를 쥐어 뜯는다. 미용실에 가야 된다는 신호다.

사실 나도 몇 개월에 한 번씩 미용실을 가는 긴 머리의 여성이었다. 덥수룩한게 싫어서 항상 날개죽지 위로 싹뚝 잘라버렸지만, 숏컷인 지금 그때의 사진을 보면 저런 무거운 머리칼을 어떻게 들고 다녔나 의심스럽다.

머리를 기르지 않는건 순전히 지금 스타일이 잘 어울려서다. 긴머리, 단발머리에 이유없듯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투블럭 숏컷에도 별 이유가 없다. 그냥 잘 어울려서. 이게 내 찰떡 스타일이라서. 그런데 보통의 스타일이 아닌 것에 다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꼭 한 마디씩 덧붙인다.

가령 엄마는 "이쁘게 낳아줬는데 선머슴처럼 하고 다닌다"는 핀잔을 놓는다. 그럼 나는 질린다는 말투로 "내가 나한테 어울리게 다니는거야."라고 받아친다. 친척 혹은 처음보는 어른들, 심지어 또래들도 아래와 같은 말을 심심찮게 던진다.

"나이가 있는데 이쁘게 화장도 좀 하고, 머리도 좀 길고"

그럼 나는 짧은 머리의 편리성과 화장의 귀찮음과 결론적으로 내가 예쁘게 보일 필요가 없다는 말들을 장난스럽게 툭툭 던지면서 방어한다. 무엇보다 현재 스타일이 제일 잘 어울린다는 말을 강조한다. 나의 이런 스타일을 처음 공감해준건 여동생이었다.

패션을 중요하게 여기는 여동생은 어깨죽지까지 내려오는 숱많은 머리를 케어하고, 고등학생 때부터 화장을 좋아했으며, 패션의 완성은 양말과 신발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외투랑 신발이 어울리는지 보고, 안의 옷과 가방이 어울리는지 보면서 전신거울 앞에서 혼자만의 패션쇼를 펼친다. 옷을 고르는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나와 정반대다. 엄마는 그런 우리를 보면서 다시 뱃속에 넣어 합친 다음에 반쪽으로 뚝 떼어 낳고 싶다 말하신다. 한 놈은 너무 꾸미고, 한 놈은 너무 안 꾸민다고. (웃음)

그런 동생에게 유일하게 인정받은 것이 바로 숏컷이다. 여동생은 중고등학생 때의 나의 포니테일 스타일이 너무 촌스러웠다며, 대학생 때 머릴 자른 것이 신의 한수라 말한다. 달덩이 같은 수수한 얼굴에 곱슬로 부풀어 오르는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다녔던 그 시절의 나는 다시봐도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로 좀 촌스럽다. 이런 스타일이 촌스럽다는게 아니라, 내 얼굴에 빗대니 수수하고 촌스럽다.

머리를 자른건 대학교 신입생 OT가 끝난 후, 뭔가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싶었다. 변하고 싶더라. 동네 새로 생긴 미용실에 방문하여 미용사 언니랑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그 언니가 추천해준 보브컷을 시도했다. 결과는 내 마음에 안 들었다. 얼굴과 따로 노는 느낌에 스트레스를 받았고, 귀와 목을 덮는 머리칼이 간지러워 주변을 벅벅 긁었다. 20살 문턱에서 설레하는 나에게 이런저런 상담을 해준 미용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이렇게 안 어울릴 수 있을까 싶었다.

1주일도 안 되어 다른 미용실을 찾았다. 거울 앞에 앉아 짧게 잘라 달라고 말했다. 미용사님은 놀라면서 정말 짧게 잘라요? 두어번 물어봤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이런 모습으로 가기엔 죽어도 싫어서 확 잘라달라고 말했다. 결과는 내 맘에 쏙 들었다. 20년만에 찾은 내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흔치 않은 스타일이기에 가끔 짧은 머리의 여성을 길에서 만나면 반갑다. 저분도 나와 비슷한 편견 속에서 싸우고 있을까 괜시리 내적 공감을 키운다. 좀 더 어깨를 당당히 펴고 다녔으면 좋겠다. '남자같다'는 말에 "남자같은게 아니라 나다운 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런 당당함으로 멋진 언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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