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다원주의적 관점과 한국언론의 프레임
-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 바라본 언론의 방향성 -
목차 1.서론 2.제물론이란? 3.장자의 제물론과 언론의 프레임 4.장자의 다원주의와 한국언론의 다양한 메시지 유통 5.결론 |
1.서론
현대 한국사회를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는 갈등과 분열이라 생각한다. 정치권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성차별, 갑질 등의 이슈가 들끓고, 국가적으로는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대치가 팽배하기 때문이다. 계층간, 이념간, 세대간, 지역간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은 대한민국 곳곳에 잠식해 있다.
언론은 이런 갈등의 양상 속에서 각 입장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조정자 역할을 한다. 더 좋은 대안이나 해결책이 나오도록 공론장을 형성하며, 미해결 사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진실을 추구한다. 이러한 점에서 언론은 ‘진실보도’와 ‘공정보도’를 사명으로 두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우리에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공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뉴스는 항상 특정한 프레임에 따라 선택되고 구성되어 수용자들에게 전달된다. 누군가의 선입견과 편견이 개입될 여지가 크고, 수용자에게는 프레임 속 이미지가 사건의 진실 그 자체로 보일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렇게 일정한 틀 속에서 세상을 판단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중국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장자(莊子)다. 장자는 대상의 한 쪽 면만 보고 판단하는 편견(偏見)과 아집(我執)을 경계했다. 편견과 아집은 자신의 관점이 보편적인 것이라 믿는 편협한 생각이다. 뉴스의 프레임 또한 기자의 눈이 기준점이 되어 생성된 편협한 틀이다. 장자는 이러한 주관적인 판단, 호오, 가치 구별에서 벗어나 사물의 다양한 면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본질(진실)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장자의 견해와 언론의 사명은 같은 맥락을 띠고 있다.
본 글에서는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 언론의 편협한 프레임을 타파하고 진실·공정한 보도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강구하고자 한다. 먼저 제물론 속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양상을 파악한 후, 어떠한 측면에서 장자가 언론의 프레임을 지양하는지 분석하고자 한다. 이후 특정한 시각에서 생성되는 프레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장자의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제안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쟁론들을 다루는데 있어 다양하고도 공정한 시각에서의 뉴스 생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것이다.
2. 제물론(齊物論)이란?
제물론(齊物論)의 제목은 다양한 측면으로 해석되는데, “사물을 고르게 하는데 대한 이론” “사물과 이론들을 고르게함” “사물에 대한 여러 이론들을 고르게 함” “모든 사물을 한결같이 똑같은 것으로 봄” 등이 있다. 제목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장자가 외부 대상에 대한 제일(齊一)을 주장한다는 것에는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다만 ‘만물(物)을 제(齊)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획일화시켜 똑같이 하나로 둔다’는 뜻이 아니다. 북송대 말기에는 제물의 물(物)을 객관사물로 이해하고, ‘세간의 견해를 조절하거나 객관사물을 변화시키는 행위’로 해석하였지만, 이는 장자가 보편적 본질을 주장한다는 것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자는 물리적 획일화가 아닌 ‘존재에 대한 가치구별에서 벗어나 만물을 조화롭게 보는 것’을 지향하였다. 이때의 가치 구별은 대소(大小), 시비(是非), 생사(生死), 미추(美醜)와 같은 상대적 개념의 ‘의식의 내용’이다. 이는 사물 자체의 속성이 아닌 인간의 관념속에서 비교우열로 가려진 ‘상대적 범주’들로, 이러한 가치구별은 “대상에 대한 상대적 우열의 규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장자의 ‘물’은 상대적 관념을 지칭하며, 이는 곧 ‘제일’의 대상이기도 하다. 상대적 개념에 관한 우화는 제물론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모장과 이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 하지만 물고기는 그를 보면 물 속 깊이 들어가고, 새는 그를 보면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와 사슴은 그를 보면 후다닥 달아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외부 대상을 봤을 때 단순히 다르다는 인식의 구별을 넘어, 개인의 기준에에 따라 특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개별인식의 주관성은 상대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이 보편적이라는 상대적 우열을 낳는다. 하지만 가치구별은 주체의 관점마다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성을 띨 수 없다. 인간의 눈에 모장이 최고의 미인일지라도, 물고기의 눈에는 커다란 생물체에 불과한 것처럼 말이다. 장자는 이러한 상대적 견해들에 대해 스스로도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범주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에 머무를 수 있다.
이처럼 장자는 인식에 따라 대상을 구분하지않고, 모든 물(物)들을 제일(齊一)의 대상으로 보았다. 이때의 제일은 “다양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조화와 일치”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다시말해 인식의 주체를 통해 형성된 주관적인 관념, 가치구별, 이분법적 사고, 시비에 따른 선입견을 타파하고 제일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 모든 대립을 넘은 초월한 세계를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물론에서는 이 하나의 세계, 실재의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3. 장자의 제물론(齊物論)과 언론의 프레임(Frame)
제물론(齊物論)에서 장자는 만물을 바라볼 때 상대적 인식의 가치구별을 지양하라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분별적으로 보지 말고, 동일한 사물이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음을 깨달으란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세상을 마주할 때 자신만의 틀에 갇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또다른 표현으로 ‘선택적 지각’이라 한다. 지각이란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극이 오관을 통해 들어와 뇌까지 전달되고 그것을 해석하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말한다. 이때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욕구·필요·태도를 비롯한 여러 심리적 요인에 따라 선택적으로 대상을 지각한다. 이 선택적 지각으로 인해 사람들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서로 다르게 생각하고 반응하고 가치구별을 한다. 외부 인식에 따라 자신의 기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장자는 이를 선입견(先入見)이라 불렀다. 선입견에 쌓인 인간은 대상에 대한 상대적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며 고집한다.
이런 선입견은 개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진실’과 ‘공정’을 추구하는 언론에게도 ‘프레임’이라는 좁은 틀이 있다. 프레임은 언론이 구성하는 창틀이다. 뉴스에서 어떤 프레임을 씌우느냐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는 달라진다. 이는 필연적이거나 조작적이다. 프레임은 뉴스제작 과정 속에서 중첩적으로 일어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만 모든 정보가 수용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많은 사건들 중에 특정한 사건이 뽑히고, 그 사건의 일련의 스토리 중 일부만 글이나 영상으로 재구성된다. 다시 말해 누구의 입장을 담고, 어떤 단어로 표현하고, 어떤 형식으로 만들고, 어느 지면(혹은 방송순서)에 배치할 것인지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프레임’이란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제물론의 <하늘의 피리소리> 우화 중 ‘구멍’에 비유할 수 있다.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바람이라고 한다. 그게 일지 않으면 몰라도 일단 일었다하면 온갖 구멍이 다 요란하게 울린다. 너는 저 윙 윙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겠지. 산림 높은 봉우리의 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옥로 같고 (중략) 큰 소리 내어 곡하는 소리, 둔하게 울리는 소리, 맑게 울리는 소리를 낸다.
바람이 불면 세상의 모든 구멍이 다 소리를 내는데, 같은 바람이어도 구멍에 따라 각각 다른 소리를 낸다. 소리가 다른 것은 바람이 들어가고 나오면서 울리는 구멍이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바람(정보)이 한 공간에서 불어도 구멍(프레임)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같은 사건이나 인물이어도 프레임에 따라 대상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처럼 말이다. 슬프게 울리는 구멍의 소리만 들을 경우, 인간은 바람의 소리가 슬프구나 인식할 것이다. 즉, 단편의 프레임은 대상에 대해 ‘그렇게만 보인다’라는 편파적 인식을 낳을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프레임은 사람들 머릿속 깊숙이 자리잡은 ‘전반적인 정보수용의 틀’, 판단 기준이 되기도 한다. 미국의 언어학자 레이코프 교수는 프레임에 대해 “세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 깊숙이 자리 잡은 심적 구조”라 정의했다. 다시말해 프레임은 사람들이 외부의 정보를 수용하고 조합하고 이해하는 통로이면서, 사람들이 실제라고 여기는 것을 창조하는 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태안기름 유출사고’ 당시, 대부분의 언로사들은 정부와 자원봉사자들의 대처에 대해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그 결과 사건의 원인이었던 삼성중공업의 책임은 서서히 잊혀졌다. 언론의 프레임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수용자들이 그 틀에 따라 사건에 대한 판단 기준을 세운 것이다.
장자의 말에 따르면, 단편적인 주관적 인식과 그 판단의 절대성은 대상의 본질을 보는 것에 있어서 훼방을 놓는다. 같은 맥락에서 프레임 또한 대상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방해한다. 프레임은 일련의 사건 중 일부를 떼어내는 틀짓기다. 그 프레임이 사건과 대상의 어느 부분을 조명하느냐에 따라 사건의 의미나 진실은 달라진다. 이는 사실구분에 상관없이 사건의 피상적인 일면이나 하나의 의미만을 부여할 수 있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프레임이 강력하게 확립될 경우, 사실과 부합하지 않더라도 사실은 무시되고 그 틀만 유지된다. 다시 말해 언론의 프레임은 대상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무시하여, 파편적이고도 단편적인 정보를 생산하는 구멍이란 것이다.
4. 장자의 다원주의와 한국언론의 다양한 메시지 유통
프레임은 사건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방해하지만, 뉴스 생산에 있어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진실되면서도 공정한 뉴스보도를 할 수 있을까? 장자는 사물의 본질(진실)을 꿰뚫기 위해서는 편견(프레임)을 깨고 사물을 전체적으로 조망해야 된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언론도 물(物)을 제일(齊一)하면 된다. 다양함 속에서 조화와 일치를 찾는 것이다. 대상과 사건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대상을 대할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한쪽만 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다양한 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물건은 저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또 이것이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의 입장만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이것을 통하여 알아보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말미암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 생겨난다는 설인 것이다.
먼저 세상에 자신과 다른 관점과 기준이 존재하며, 그에 따라 진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다양성” “관점과 인식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 어떤 사물도 단 하나의 잣대에 따라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겐 존경스러운 독립 투사지만,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테러리스트였다. ‘독립투사와 테러리스트’라는 호칭은, 인식의 주체가 대상(안중근)을 어떤 가치관으로 인식했느냐에 따라 붙인 수식어다. 다시말해 당시 언론이 어디에 초점을 두어 프레임을 씌우느냐에 따라 안중근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어떠한 대상은 인식주체의 기준에 따라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의 본질(사건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관점이 필요하다. 사물의 다양한 면모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다른 의미들을 한번에 조망해야지, 비로소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앞의 예시에 따르면 안중근은 독립투사이거나 테러리스트로 인식된다. 하지만 일제강정기의 역사와 안중근의 생애, 인권 타당성 등 다양한 맥락 속에서 넓은 관점으로 바라보면 보다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안중근 의사가 폭탄을 던졌다는 사실(fact)만 보도할 경우, 그건 대상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관점의 다양성을 배제하고는 진실에 다가가기 힘들다. 이처럼 언론에서의 ‘이것도 저것도’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대상에 대한 가치구별하는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모아 보편적 진실을 찾기 위한 해법이다. 즉, 언론이 진실성과 공정성을 취구하기 위해서는 특정하고도 단편적인 프레임에서 벗어나, 사건과 대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탐조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측면에서 사건을 조명한다는 것은 ‘다양한 이야기의 유통’과도 같다. 앞에서 말했듯이 각 뉴스의 프레임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뉴스의 생산 구조상 누군가의 주관적 관점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즉 다양한 프레임을 시장에 유통시키자는 것이다. 특히 뉴스에 보도되는 사건은 여러 이해관계와 인과관계, 숨겨진 사실과 생략된 이야기가 얽혀있어 그 진실을 파헤치기 매우 어려우므로, 대상에 대한 여러 관점이 필요하다. 사실(fact)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팩트는 단편적 사실에 불과하다. 일련의 사건 중 한 면을 떼어내어 보도(프레임)하는 것도 팩트에 기반한 뉴스지만, 그것을 진실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반면 다양한 이야기의 유통은 단편적 사실에 앞뒤 맥락을 붙여준다. 특히 보편타당하고 특정한 진리가 없는 다원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관점의 맥락’이 중요하다. 사람마다 삶의 기준과 우선 순위, 가치관 등이 달라 여러 시각과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 기준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판단할 수 없으며, 다양한 입장을 수용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찾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특정 프레임에 여러 입장의 이야기를 덧붙이면 그 프레임은 옅어지고, 다양한 프레임의 비교분석으로 인해 ‘fact’가 ‘truth’에 가까워진다.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망은 언론의 역할인 상관조정에서도 유용하게 작용된다. 낙태, 안락사, 청소년 투표 등 단 하나의 기준으로 시비를 적용할 수 없을 때,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더 나은 결정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습지에서 자면 허리에 병이 나고 몸이 말라 죽게되는데,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나무 위에서는 사람은 두려워 덜덜 떠는데 원숭이들도 그러한가? 이 세 가지 것들 중에서 어느 것이 올바른 몸 두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가?
편함에 대한 올바름이 주체에 따라 다르듯이, 습지에 대한 인식 또한 주체에 따라 다르다. 일반인에게 습지는 눕기엔 불편한 장소지만 미꾸라지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어부들에겐 생계가 걸린 장소면서 어린이들에겐 생태학습 공간이 된다. 이렇게 각자의 주관에 따라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갈라지기 때문에 특정한 옳음과 좋음을 결정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2016년부터 논란이 된 ‘사드배치’의 경우, 국가 간의 긴장상태, 사드의 필요성과 효율성, 환경적 문제, 위치 선정 등 여러 관점을 통해 시비가 갈리면서 현재까지도 하나의 옳음을 찾지 못했다. 옳고 그름과 같은 가치구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특수한 사회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과 상황에서 형성된 임의적, 주관적 규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의 의견에 대한 ‘다름’을 인정하되, 보다 진실되고 나은 것을 찾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토론이 필요하다. 언론이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시각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유통해야 되는 또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한 입장이라도 뒤처지지 않은 상태에서 모두가 합의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공정보도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언론은 다양한 관점을 균등하게 보도하여 사건의 진실을 찾거나,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야 한다.
5.결론
지금까지 장자의 제물론을 통해 언론의 진실보도와 공정보도의 확립을 위한 방안을 논의해 봤다. 장자의 제물론은 대상에 대한 인식의 주관성으로 인한 상대주의적 관점과 그것의 편협한 시각을 지양하기 위해 원근의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이에 단편적 프레임으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를 꼬집으면서, 장자의 주장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의 유통”이라는 대안을 제시하였다.
다만 장자는 한 사물이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특성, 즉 대상을 보는 주체의 인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두고 이에 관한 시비, 선악, 미추와 같은 가치구별이 불가능하다 여겼다. 이는 현대 언론의 상관조정역할과는 다른 방향을 띠고 있다. 언론은 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시장에 보내어 진실을 캐낼 뿐만 아니라, 특정 갈등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르거나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대상은 사회적·문화적·역사적 흐름에 따라 가변적이므로, 다양한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되 시비에 관한 보편타당의 진리를 찾기 힘들다. 이에 언론이 장자의 철학을 모두 수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장자의 다원주의적 관점과 상대주의적 관점은 서로 다른 견해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론의 공정성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지표임에 틀림없다. 다양성이 구현된다는 것은 다른 견해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배타적 편향성을 극복하는 것에 탁월하다. 또 매체의 프레임에 따른 주관적 인식이나 판단이 개입되어도 여러 이야기의 유통으로 사건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방향이 된다. 이처럼 이것과 저것을 따지는 가치구별을 뛰어넘어, 모든 것을 꿰뚤어보는 ‘밝음’을 지향할 때, 우리는 다양한 관점에서 큰 맥락을 잡아 진실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언론은 단편적 프레임이 갇히지 말고 하나의 붕새처럼 다양한 관점에서 저 멀리 조망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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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주, 『장자』 (경기: 연암서가, 2010)
조한석, 「제물론 편명 해석의 역사적 변천과 철학적 의미」, 한국철학논집 제19집
이진경, 「장자의 인식론에서 상대주의의 타당성 검토」, 『대동철학회 논문집』 제54집
데니스 맥퀘일,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 양승훈 역 (서울: 나남, 2002)
김원용·이동훈, 「신문의 보도 프레임 형성과 뉴스제작 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언론학보』 48권 4호
이동훈·김원용, 『프레임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
조성식, 『너는 어는편이냐?』 (서울: 책밭,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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